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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속 캐릭터 현실창조…완벽한 분장은 신스틸러 그 자체”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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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디자인

공연 시작 3시간 30분 전. 콜타임(CALLTIME)에 맞춰 배우와 스태프가 극장으로 모인다. 캄캄했던 극장에 불이 켜지면 ‘오늘의 공연’을 위한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맨얼굴로 거울 앞에 앉는 배우들.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시간이다.

 

“캐릭터마다 분장 시간은 천차만별이에요. 무대 밖과 다르지 않은 메이크업 수준의 캐릭터도 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뮤지컬 ‘데스노트’(6월 19일까지 충무아트센터, 7월 1일~8월 14일까지예술의전당)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신(死神)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일찌감치 분장을 시작한다. 새하얀 의상에 걸맞게 밀가루를 뒤집어쓴 백색의 얼굴을 한 사신 ‘렘’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드레드(dread·긴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거나 뭉쳐 늘어뜨리는 것) 가발까지 착용한다. “만화 원작과 똑같이 해달라”는 제작자의 요청에 김성혜 분장 디자이너가 떠올린 아이디어다. 30~40분에 걸쳐 분장을 마치면, 배우들은 눈빛이 달라진다. ‘현실 로그아웃’. 배우들은 “완벽하게 변신한 얼굴을 보면 이제 무대에 오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이제 무대로 나선다.

 

무대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다. 이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세계다. ‘분장’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한다. ‘데스노트’가 공연 중인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콜타임 두 시간 전에 김성혜 분장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는 “분장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분장 디자이너는 공연계의 ‘희귀직업’ 중 하나다. 현재 국내에서 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최정상 분장 디자이너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김성혜 디자이너는 할리우드 시네마 메이크업 스쿨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연극, 뮤지컬을 섭렵하고 소극장부터 대극장까지 거치며 그는 지난 20여년간 무려 36편의 작품에서 무수히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한 해에 보통 대여섯 편의 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사람들이 종종 넌 어떻게 이걸 20년을 했냐고 물어봐요. 이 일은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고, 재연·삼연 같은 작품을 해도 3개월 내내 새로워요. 배우들이 매번 같은 컨디션인 날이 없으니 늘 도전하는 재미가 있어요.”

 

 

분장의 영역은 생각보다 방대하다. 단지 얼굴 메이크업에서 머물지 않는다. 얼굴부터 머리, 손과 발은 물론 몸에 걸치는 다양한 소품도 해당한다. 몸에 묻어나는 피 역시 분장으로 구현한다.

 

김성혜 디자이너가 작품에 투입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본 분석’이다. 대본 안에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아내는 과정이 첫 번째다.

 

“이 작품이 어떤 시대이고, 이 인물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대본을 분석해요.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트렌드는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을 가장 먼저 해요.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 대본 안에 모두 담겨 있으니까요. 공연 안에서 이 인물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고요 ”

 

단서를 파악하면 본격적인 리서치 과정에 돌입한다. 특정 시대 속 인물을 만들어내는 만큼, 철저한 역사 고증과 시대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 과정이 고되다. 사실 ‘맨 땅의 헤딩’인 경우가 많다.

 

김 디자이너는 “아무리 같은 작품을 하더라도 매시즌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배우나 분장팀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로 올라간 적이 있는 작품이라면, 기존작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하다 못해 가르마의 방향이라도 바꾸려 하고, 매순간 새로운 모습을 담아내면서도 기존 틀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으로 나아가도록 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고, 진화한다. 공연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은 없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과의 소통 역시 중요하다. 배우들의 연기에 따라 분장의 디테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풍성한 수염 가발이 특징이에요. 캐릭터를 조금 진중하게 갈 것인지, 코믹하게 갈 것인지에 따라 분장도 달라져요.” 연기엔 웃음 포인트가 많은데 점잖게 쭉 뻗은 관우형 수염은 ‘엇박자’가 난다. “그럴 땐 수염의 컬을 더 많이 만드는 식으로 디테일을 살려요.” 이 과정을 주인공은 물론 조연 배우, 앙상블 배우까지 이어가니 손대는 부분이 많다.

 

분장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김 디자이너는 “디테일에 집착”한다. 그가 오래 관찰하는 부분은 배우들의 외형이다. 이목구비는 물론 얼굴형, 머릿결, 피부상태, 알레르기 유무까지 파악한다. 가발을 씌우는 캐릭터의 경우 “얼굴형과 두상에 맞게 제작해야 한다”. 김 디자이너는 뮤지컬 ‘스위니토드’에서 러빗부인의 경우 키가 작은 배우의 머리는 위로 높게 올리고, 키가 큰 배우는 옆으로 부풀린 머리를 연출했다. 그는 “배우마다 체형이 다르니, 같은 캐릭터라 해도 미세한 부분들에서 차이가 난다”며 “키, 비율 등 신체적인 요소가 분장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외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배우들이 무대에서 세 시간동안 가장 편안한 상태로 노래하고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완벽한 분장’은 그것 자체로 ‘신 스틸러’다. 때때로 ‘결정적 장면’들을 만든다. 뮤지컬 ‘드라큘라’가 대표적이다. 오랜 시간을 품은 ‘어둠의 성’에서 길게 늘어뜨린 백발, 잔뜩 주름진 얼굴과 손의 드라큘라 백작이 젊음을 되찾는 장면은 공연 초반부에 등장,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과 카타르시스까지 안긴다.

 

“연출을 맡은 데이비드 스완이 ‘드라큘라 백작이 20초 안에 400년을 연기해야 한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니, 어떻게 보여줄지 생각해달라’고 했어요.” 오랜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주름진 마스크를 손으로 벗겨내 젊은 얼굴로 회춘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 장면에선 자칫 마스크가 찢어지거나 파손될 수 있다”며 “그럴 때면 언제 어디에 있든 공연장으로 달려가야 한다”며 웃었다.

 

“분장의 최종 목표는 배우에게 완전히 어우러진 캐릭터로의 완벽한 구현이에요. 분장을 하는 이유 역시 배우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분장을 통해 관객과 배우 모두 몰입된다면, 그것으로 작품 속 인물과 세상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 김성혜 분장 디자이너 주요 작품

 

1. 뮤지컬 ‘데스노트’의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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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트에 이름이 적히면 죽는다’. 독특한 소재의 뮤지컬 ‘데스노트’는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사건이 ‘신들의 장난’의 결과라는 데에서 작품이 출발하기에 사신의 존재감은 강력하다. 김성혜 디자이너는 “만화 속 캐릭터를 구현해야 하는 만큼 정교한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특히 렘의 캐릭터 창조가 쉽지 않았다. 원작에선 “성별의 구별이 없고”, “인간을 사랑하다 슬픈 모래가 되는 감성적인 캐릭터”다.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하얀 외형을 강조했다. 온통 새하얀 렘은 방금 만화에서 튀어나오는 것과 같은 ‘시각적 충격’을 안긴다. “원작에서 렘이 달고 다니는 동글동글한 털실 뭉치는 드레드 가발”로 구현했다. 배우들이 오래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만큼 무게를 줄이기 위해 흑인들이 드레드를 할 때 쓰는 가벼운 심지를 넣었다. 가발은 3일에 한 번 샴푸를 하고, 매일 헤어 라인을 세척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2. ‘드라큘라’의 비포 앤 애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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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불멸의 삶’을 사는 드라큘라는 ‘비포(Before)’, ‘애프터(After)가 중요한 캐릭터다. 김 디자이너는 애프터의 ‘탱탱한 젊음’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포의 캐릭터를 고심했다. 그가 만든 드라큘라의 외형은 이 작품의 ‘킬링 포인트’다. 불과 20초 안에 ‘늙고 추악한 얼굴’에서 ‘젊고 아름다운 얼굴’로의 변신을 위해 김 디자이너는 마스크를 제작했다. 드라큘라 백작을 맡은 배우들의 얼굴 본을 뜬 뒤 실리콘으로 피부 재질을 만들었다. 김 디자이너는 “노역을 과장되게 표현하기 위해 실리콘 피부 재질에 조소 작업을 통해 주름 디테일을 넣었다”며 “제작기간만 해도 한 달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슬레이브’ 역할의 세 배우도 공연 초반 관객을 압도한다. 화려한 금발 머리에 속눈썹을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두 개씩 붙인다. 방금 피를 마신 뱀파이어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붉은 입술을 일부러 번지게 그렸다. “피를 갈구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한 방법”이다.

 

 

3. ‘시라노’의 큰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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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는 주인공은 남들보다 도드라지게 큰 코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기형적으로 보이면 안 되는 코의 모양새다. 그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세 시간동안 코를 붙이고 있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며 “코를 제작할 소재를 찾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코는 “무게가 0.1g이라도 더 나가면 무대 위에서 주저앉고 떨어지기 일쑤”였다. 처음엔 실리콘으로 제작했으나, 최종 버전은 특수분장용 소재를 여러 가지 섞어 시라노의 코가 만들어졌다. 김 디자이너는 최적의 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직접 코를 부착하고 매일 서너 시간씩 테스트를 했다. 그는 “배우들의 그날 그날 컨디션과 전날 식사의 종류, 습도와 온도 등이 코의 상태를 결정한다”며 “배우마다 전체 코와 콧구멍의 모양, 코를 찡긋하는 버릇까지 감안해 만들어 코만 봐도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4. ‘모래시계’ 속 잉어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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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귀가시계’라고 불린 ‘모래시계’(8월 14일까지·디큐브아트센터)를 무대로 옮긴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특수분장 수준에 가깝도록 인물의 변화를 요하는 분장이 아닌 현대극은 “분장을 할 게 없어 도리어 더 힘들다”고 한다.

 

작품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는 캐릭터는 조직폭력배이자 태수의 친구로 나오는 ‘야망남’ 종도다. 종도는 1막과 2막에서의 변화가 상당하다. 1막에선 뒷골목의 흔한 조직폭력배였다면, 2막에선 ‘카지노 대부’를 꿈꾸며 야비한 짓을 서슴치 않는 인물로 나아간다. 윗사람에게 굽신거리며 아부하는 종도의 성향은 목에 새겨진 ‘잉어 문신’으로 구체화됐다. 김 디자이너는 “1980년대 시대 분위기와 당시 디자인을 많이 찾아봤고, 문신으로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봤다”며 “잉어 문신은 1인자가 되고 싶어 부화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보통 조직의 부하들이 많이 하는 것이라 종도의 목에 넣게 됐다”고 말했다.

 

 

5. ‘지킬 앤 하이드’의 촉촉한 머릿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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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앤 하이드’의 킬링 포인트는 하이드의 촉촉한 머릿결이다. 지킬이 지머리 가발을 풀어헤치며 하이드로 변신할 때 물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머릿결이 객석 멀리에서도 눈에 띈다. [오디컴퍼니 제공]

한 사람이 가진 두 가지 인격을 들여다보며 인간 본성을 성찰하는 ‘지킬 앤 하이드’의 핵심은 주인공의 헤어 스타일이다. 지킬 박사와 그의 ‘악의 자아’ 하이드의 상징은 꽁지 머리 가발이다.

 

이 가발을 만들기 위해 김 디자이너는 국내외에서 생산되는 모든 모발 제품을 사용했다. 무대 위 하이드의 가발은 놀랍도록 촉촉한 비단결이다. 객석 멀리에서도 포착될 만큼 ‘시선 강탈’이다. 관객들은 “샴푸향이 나는 것 같다”, “올해의 미역상이다”라는 반응까지 내놓는다. 김 디자이너는 “하이드는 음침한 악의 자아인 만큼 젖은 머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머릿결의 비결은 무수히 많은 모발 제품의 조합이다.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섞어 최상의 머릿결을 만들었다.

 

고승희 기자 /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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