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대로가 가로지르는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날카롭고 뾰족한 삼각형 건물이 우뚝 섰다.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낮은 네모 빌딩들이 촘촘히 나열된 바둑판 도시에 들어선 ‘케이크 조각’은 시선을 절로 빼앗는다. 도산대로의 건축 문법을 깨버린 이 건물은 개관 4개월 만에 청담동의 랜드마크가 됐다. 송은문화재단의 신사옥이다.
송은의 신사옥은 세계적인 듀오 건축가로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Herzog & de Meuron)’으로 활동 중인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의 첫 국내 프로젝트다. 일명 ‘프로젝트 473’.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의 473번째 프로젝트라는 뜻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7년 3월 콘셉트 디자인과 설계를 시작, 2018년 10월 착공에 돌입해 무려 4년 6개월의 여정을 거쳐 완성됐다.
송은문화재단 측은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세심하고 유기적인 접근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건축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선례를 만들어왔다”며 “신사옥 프로젝트 역시 지역적인 맥락과 문화, 환경에서 많은 건축적 영감을 받으며 진행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이 설계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핫 플레이스’가 됐다. 전 세계 곳곳에 랜드마크를 건축한 두 사람은 “송은문화재단 신사옥은 서울에서 가장 상업적인 지역에 자리한 비영리 전시 공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대 미술관을 설계하면서 예술과 사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예술과 예술가, 미술수집가와 대중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니즈를 고려했고, 이로써 도시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청담동 문법 깬 건물…규제 지킨 미학적 가치=서울 강남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에 들어선 신사옥은 지상 11층(57m), 지하 5층 규모로 올라섰다. 도산대로를 거닐다 마주하는 신사옥은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독특한 특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카로운 삼각형 형태”라는 점이다. 건물이 삼각형 모양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국내 건축법 때문이다. 청담동은 독특한 지역이다. 건축법상 다양한 규제가 혼재돼 있다. 대로변 기준 전면으로는 5m의 이격거리를 둬야 하고, 차량 진입로를 위해 6m의 공간을 둬야 한다. 건축물의 고도 제한이 걸려 있어 3~4층 건물이 주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다양하게 어우러져 일조권 사선제한 등의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건물마다 형태와 연면적이 제각각이다. 사실 도산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급격하게 진행된 변화로 조화로움을 찾기 어렵다. 다양한 양식과 크기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송은문화재단의 신사옥은 “바닥 면적과 토지 이용 규제 등 설계 조건 안에서 실현가능한 부분을 고려”해 나오게 됐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실제 사용면적을 최대화하고 국토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미학적 가치를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송은의 신사옥은 ‘반전의 미학’을 품고 있다. 대로변을 바라보는 건물의 입면(파사드)과 마주하면 그 뒷면을 짐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정면에선 도산대로의 일반적 풍광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파사드로 이질감을 줄였다. 폐쇄된 파사드에서 내부와의 접점을 만드는 것은 13m의 가느다란 직육면체로 낸 두 개의 창이다. 정면에선 꽉 막힌 ‘흔한 공간’처럼 보이나, 뒷면으로 돌아서면 정반대다. 가파르게 경사진 뒷면은 정원을 마주한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낮은 뒷면은 정원을 마주하고 있어 보다 친밀한 저층 규모”라고 했다. “주택가와 인접한 면으로 점점 높이가 낮아져 인근 주거 시설과 별다른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도록 설계됐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인간은 인지하는 기계이며 우리에게는 ‘감각’이라는 것이 살아 있다. 감각함으로써 살아 있음을 느낀다”며 “주변의 맥락과 주어진 설계 조건 안에서 놀라운 감각적 경험을 느끼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내부는 전시 공간, 사무실, 공공 장소를 배치했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각각의 공간이 실험적이면서 예상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혼합돼 지상과 지하에 펼쳐지게 했다”고 설명했다.
1층의 양 측면에는 보행자와 자동차의 출입을 위한 오목한 입구가 각각 하나씩 마련돼있다. 주차장으로 접근하는 자동차 경사로를 둬야 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자동차 진출입로라는 실용적 기능을 바탕으로 경사로의 나선형 운동이 지닌 조각적 가능성을 탐구”했고, “주 계단과 지하 갤러리, 그 사이에 있는 3층 높이의 열린 공간이 지닌 기하학적 형태 또한 규정했다”는 설명이다.
▶ 촉각의 건축·발견의 건축·교감과 조화의 공간=송은의 신사옥에서 특히나 눈에 띄는 부분은 ‘생생한 촉각’이다. 파사드의 콘크리트 외벽은 목판 거푸집을 사용해 소나무의 질감을 살렸다. 차가운 철골이나 투명한 유리가 아닌 나무 무늬가 살아있는 따뜻한 감각을 외벽에 구현했다. 기하학적인 형태, 날카롭게 내리 깎은 미니멀한 구조의 건물과는 완전한 대비를 이루는 감각이다. 목판의 거푸집마다 문양과 결이 달라지니 외벽마저 하나의 조각품이 되는 ‘촉각의 건축’이다. 차가워야 할 콘크리트가 “광선의 변화에 따라 건물의 표정을 시시각각 달라지게” 만든다.
이들은 “건축 설계 당시부터 ‘숨어 있는 소나무’라는 ‘송은(松隱)’의 시적인 의미에 영감을 받았다”며 “작은 샘플부터 실제 크기의 모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통해 재료를 실험했다. 소나무를 시각화하면서 건축물의 촉각적 경험을 유도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탐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표면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분명하게 구현하는 것은 건물의 형태를 촉각적 휴먼 스케일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낡아도 문신처럼 새겨져 세월의 견고한 아름다움이 남아있을 모습이다. 여기에 내부 공간의 표면은 반사 재질의 은박 마감을 활용했다.
송은의 신사옥은 ‘발견의 즐거움’을 만나게 되는 공간이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숨은 공간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폐쇄적으로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의 건물은 완전한 개방형이다. 1층의 로비부터 층층마다 자리한 테라스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뻥 뚫린 내부 공간이 밖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한다. “사람들을 환영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날카로운 외벽 디자인과는 대조되는 넓은 나선형의 계단은 송은 신사옥에서 발견한 ‘반전의 묘미’다. 로비에 발을 들인 후, 계단에 도착하면 지하로 뚫린 공간이 깊은 우물처럼 눈에 들어온다. 지하 2층에서 지상 1층의 천장까지 3개층이 뚫린 구조가 무척 흥미롭다. 지하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거대한 물방울을 보는듯 아름답다. 이들은 “수직적인 건축물로, 맨 위층부터 층별로 다른 공간적 경험을 갖도록 했고, 전시 공간도 다채롭게 구성했다”고 했다.
환경 문제를 고려해 ‘지속가능한 건축’을 선보인 것도 송은 신사옥에선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재료부터 다르다. 이곳은 “생태학적인, 재활용의 저탄소 건축자재”로 지어졌고, “건축 핏-아웃(인테리어)은 에너지 절약 제품”을 두루 썼다. 특히 남향 파사드의 미니멀한 개구부는 전체적인 일조량을 줄이면서 갤러리 공간에도 햇빛이 유입되도록 했고, 지상층의 각 사무실 공간에는 신선한 공기를 위해 드나들 수 있는 테라스를 뒀다. 이는 건축 디자인의 측면과도 연결된다. 1층의 정원은 지역 식물을 사용했다. 이 공간은 누구나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게 했다. “주변 이웃에게도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서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송은 신사옥에 미술관의 본질을 부각하면서도 지역 특성으로 안게 된 점을 보완하는 건축적 요소를 담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 것은 교감과 조화다. 이들은 “관람객과 예술작품의 교감이 방해받지 않는 공간”이자 “복잡한 도시 안에서 한걸음 떨어져 예술을 바라보는 공간”으로 송은 신사옥을 설계했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Herzog and de Meuron, 이하 HdM)은?=“건축은 기능도 중요하지만, 건물 안에서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공간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누리느냐도 중요하다. 건축은 기능(function)과 인지(perception), 표현(expression)이 동시에 충족돼야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세계적인 건축가 듀오 자크 헤르조그(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 뫼롱(Pierre de Meuron)이 이끄는 건축 설계 사무소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하고 있으며 런던, 뉴욕, 홍콩, 베를린에 지사를 두고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영국 런던 템스 강변의 거대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모던을 비롯해 스위스 라우펜의 리콜라 창고, 현대 미술 갤러리인 괴츠박물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도미누스 와이너리, 도쿄 아오야마 프라다 빌딩,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많은 공공시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러 설계를 통해 새로운 물성과 구축성을 탐구하며 주목 받았고, 2001년에는 건축가에게 최고의 영예인 미국의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하며 독보적 자리를 점했다. 2007년에는 영국왕립건축가협회에서 수여하는 로열 골드메달(RIBA Royal Gold Medal)과 일본 프리미엄 임페리얼상(Praemium Imperiale)을, 2014년 MCHAP상(Mies Crown Hall Americas Prize) 등 수많은 건축상을 수상했다.
고승희 기자 /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