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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설명이 아닌 사람과 스토리를 담아 새로운 세상 만들죠”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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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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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는 어둑한 하늘 아래로 두 개의 계단이 교차돼 무대에 자리 잡았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계단을 가로질러 내려온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재해석한 뮤지컬 ‘더 데빌’(2월 27일까지·드림아트센터). 엇갈린 계단은 상징적이다. “이 무대는 디자인 자체가 단순해요. 특별한 움직임도 없고요. 작품은 선과 악, 그것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선택에 따라 엇갈릴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단과 오르내리는 동선으로 풀어본 거예요.” 계단으로 구축한 무대는 ‘더 데빌’의 주제와 세계관을 압축한다.

 

무대 디자이너는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텅 빈 공간’에 사람과 이야기를 채워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무(無)에서 유(有)가 태어난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길게는 2~3년의 제작 기간을 거친다. 긴 시간만큼의 수고로움이 쌓이나, 막이 오르면 고단한 기억은 사라진다.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는 “아무리 지쳐도 구상한 디자인이 어떻게 보여질까 상상하면 힘듦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특히 리허설을 열 번 이상 해도 관객이 들어온 첫 공연의 공기는 이전과는 전혀 달라요. 그 순간을 잊기가 힘들어요.” 그는 명실상부 공연계의 ‘원톱’ 무대 디자이너다. 오필영(41) 디자이너는 2009년 ‘지킬 앤 하이드’ 월드투어로 대극장 뮤지컬에 데뷔한 이후 지난 13년간 국내 공연계의 정상을 지켰다. 개막을 앞둔 ‘데스노트’(4월 1일부터·충무아트센터)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신작 준비에 한창인 오필영 디자이너를 만나 그의 ‘무대 이야기’를 들었다.

 

 

 

무대 디자이너로의 삶은 우연처럼, 운명같이 찾아들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무대 미술 쪽으로 진로를 확장했다. “연기와 달리 디자인은 내가 한 작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2003년 대학로 연극을 통해 무대 디자이너로 첫발을 뗐고, 이후 뉴욕대학교 티쉬예술대학원 석사를 밟고 돌아와, 공연계의 ‘상징적 이름’이 됐다.

 

무대는 시시각각 변한다. 단 한 번도 무대가 바뀌지 않는 소극장 뮤지컬도 있지만, 대극장 뮤지컬은 한 작품당 많을 경우 80장면이 등장한다. 러닝타임을 제외하고 160분 공연이라면, 2분마다 장면이 바뀌는 셈이다. 오 디자이너의 무대는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관계가 담기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메시지가 함축된다. “무대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작품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대 디자인을 위해 오 디자이너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본 공부’다. “누구보다 대본을 많이 공부하고, 리서치를 하는 데에 시간을 오래 쓰는 편이에요. 특히 대본의 이야기를 들여다 봐요. 그 이야기라는 것은, 작품의 줄거리가 아니라 작품마다 고민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그걸 발견하면, 대본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요.”

 

그런 다음 ‘정서 리서치’의 과정을 거친다. 무대를 구체화하기 위한 일반적인 자료 수집 과정과는 다르다. 오 디자이너가 말하는 ‘정서 리서치’는 “작품에 반응하는 나의 정서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작품이 가진 이야기와 내가 가진 정서가 만나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에서 저의 무대 디자인이 시작돼요. 정서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매일 달라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특히나 정서 리서치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본을 통해 받아들이는 무수히 많은 정서의 총체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대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작품이 나가야 할 방향이 세워진다. 오 디자이너가 구현하는 무대가 차별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체적인 “공간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주요 도시나 장소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형상화한다.

 

“대본을 처음 볼 때부터 공간 설명은 지우고 봐요. 인물과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인물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 안에서 인물이 느끼는 정서에 집중해요. 그런 정서적 표현에 도움이 되는 선택들에 집중하는 거고요. 공간에 대한 설명은 현대 무대 디자인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디자인 간의 벽이 무너지고 융합되는 만큼 이야기와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관객에게 더 중요한 시대가 됐어요.” 오 디자이너는 특히 “뮤지컬은 음악이라는 큰 존재가 있어, 음악이 요구하는 것을 무대 디자이너가 해야 한다”며 “음악적 변화와 거기에 따른 정서적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 역시 공간의 설명보다 정서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환경“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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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디자이너 이름 뒤에 적힌 많은 작품들은 그의 성실한 10여년을 설명한다. 무대로 증명한 성취들은 몇 줄로도 부족하다. 늘 ‘최고’로 불리지만, 오 디자이너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무대 아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창작자들이 배우, 제작자들과 동등하게 작업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협업 체계를 만들었다. 오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무대는 물론 조명, 영상, 소품 디자인까지 담당하는 창작자들과 함께 ‘이모셔널 씨어터(Emotional Theatre)’라는 일종의 ‘창작집단’으로 시작을 알렸다. 무대 디자인을 완성하고도 극장에 들어선 이후에야 조명, 영상 등을 확인해야 하는 제작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그는 ”디자인 공연계가 굉장히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며 ”작업 환경에서의 소통과 시간 부족, 불합리한 대우 등을 개선하기 위해 누구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데스노트’는 이모셔널 씨어터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대부터 조명, 영상까지 제작하니 당연히 효율적이다. 오 디자이너가 전체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인 디렉터’로의 역할을 한다. 그는 ”‘데스노트’는 기존 작품에선 볼 수 없는 무대가 될 것“이라며 ”조명과 영상, 무대와 영상의 경계 구분이 어려운 새로운 시도가 많다. 이전의 뮤지컬 언어로는 보기 힘든 장면들이 많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 디자이너의 향후 10년에는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연계 전체의 공생을 위한 비전이 담겼다. 그는 “창작자들이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의무를 다 하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명의 창작자 개인과 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연계 전체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출발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고승희 기자

 

고승희 기자 /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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