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삶은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찢어진 형태죠. 한 발은 여기에 있고, 다른 발은 저기에 있는 거예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했다. 그가 국적을 말하면 “한국이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 되돌아오던 때부터 이태원이든 강남이든, 세계인에게 ‘자기만의 한국’이 그려진 지금까지. 설치미술가 양혜규는 스스로에 대해 “하이브리드 삶의 형태를 살고 있다”고 했다. 경계인으로의 작가에게 ‘전통과 현대’, ‘대량생산과 수공예’, ‘일상과 비일상’ 등의 이원성(二元性)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덴마크 국립미술관(SMK)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첫 개인전 ‘양혜규 : 이중 영혼’에선 신작 조각이 전시 중이다. 덴마크 식민지였던 그린란드계 작가인 피아 아르케(1958∼2007)와 프랑스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덴마크 조각가 소냐 펠로브 만코바(1911∼1984)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두 작가는 모두 비주류였고, 소외된 삶을 살았다. 단일한 문화와 국가적인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 작가들이다. 한 쌍으로 된 작품 중 하나는 펠로브 만코바의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덴마크의 식민주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아르케의 작품 세계에서 기인한다.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시도였다.
최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양혜규는 “덴마크에 비판적인 두 작가를 다루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예요. 당사자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커진 만큼, 이누이트가 아닌 사람이 이누이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국립미술관의 입장에선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이번 전시는 “두 사람을 기리는 전시가 아닌 양혜규의 개인전”인데, 이곳에서 두 작가를 화두로 삼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다. 이미 미술계에선 백인 작가가 흑인 이야기를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른바 ‘다나 슈츠(Dana Schutz) 현상’이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화두를 점유, 이득을 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혜규는 “겁대가리 없이 한 것”이라고 툭 던졌다. 하지만 두려움 없는 추진은 작가로의 존재 이유를 되짚을 만큼 중요한 선택이었다.
“타자(他者), 타자성(他者性), 타지(他地)가 저의 화두인 만큼 두려움 때문에 작업하지 않는 것은 제 근간을 흔드는 일이에요. 자기 것이 아닌 타자성까지 합했을 때 진짜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두 작가는 덴마크 전시에서 내게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된 인물들”이라고 했다. 신작이 나오기까지 깊은 연구과 공부가 이어졌다. 수많은 자문도 받았다. “다른 문화에 대한 감수성 없이 일방통행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경계하는 것이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다. 두 작가에게 영감받은 작품 ‘소리 나는 중간 유형-이중 영혼 (Sonic Intermediates - Double Soul)’은 칼스버그 재단 후원으로 덴마크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작가들을 기리는 전시실도 별도로 마련됐다.
양혜규는 현재 국제 무대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동시대 한국 미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많이 줄였다”지만, 올해에도 전시가 많다. 초기작부터 신작(1994~2022)까지 50여 점이 나온 덴마크의 첫 개인전을 비롯해 오는 7일부턴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단체전 ‘종잡을 수 없는 침묵’(9월 5일까지)이 열린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 3인전 ‘슐레머에게 동하다 - 100년 만의 삼부작 발레’(4월10일~10월 9일)에도 참여한다. 봄과 가을에 베를린, 파리 갤러리 개인전도 예정돼 있다.
“전 매번 유니크하고, 매번 전력투구하는 스타일이에요. 궁극적으로 지치는게 저의 목표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서 나가 떨어진다면 그것만큼 좋은게 어디 있겠어요. 소진되면 회복이 있을 것이고, 그 소진은 끝이 아닌 회복을 위해 양분을 먹는 과정이니까요. 전 이런 사이클을 굉장히 좋아해요.”
양혜규의 관심사 역시 지치지 않고 확장한다. 애써 영감을 찾아나서진 않는다. ‘재미’와 ‘흥미’를 위해 공부하고 파고든다. 그러는 와중에 ‘의외의 만남’이 그의 작품 세계를 만든다. 블라이드나 짚, 방울과 같은 재료로 일상적인 풍경에서 초월적 가치를 아우르는 작업을 했다.
지난해 시작한 한지(韓紙) 콜라주 연작(‘황홀망’)도 그렇다. 그는 “블라인드에 매료돼 오래 작업했듯이 한지에 매료됐다”며 “절대적인 것은 없고 항상 변한다. 내가 이런 걸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굿을 할 때 종이를 접어 오린 후 다시 펼쳐 만드는 ‘설위설경’(設位設經)이 황홀망(恍惚網) 작업의 바탕이 됐다. 양혜규는 종이라는 미미한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는 영적인 행위에 주목, 한지를 이용한 무구(巫具)로 관심을 넓혔다. 그는 “종이로 만든 이 모든 것들이 신을 맞이하는 도구라는 것이 너무 재밌지 않냐”며 “일개 개인이 생각한 것이 아닌 대대로 내려온 의례로서 쌓이고 쌓여온 것”이라고 말했다.
“종이로 무언가를 만들어 넋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작가들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구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의 주류인 기독교적 전통에 반하는 이교도적 전통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무속, 샤머니즘과 연결됐어요.”
‘황홀망’은 오는 29일 개막하는 베를린의 바바라 빈 갤러리 개인전, 하반기 파리 샹탈 크루젤 갤러리 개인전을 통해 유럽에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양혜규는 “우리나라에는 한지라는 어마어마한 재료가 있다”며 “이 작업을 유럽에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말한다. 양혜규에겐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전 작품이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끓어 넘치는 스타일이에요.” 그 샘물은 호기심이다. 양혜규는 “내 호기심의 근본은 공감능력”이라며 “단순히 알고 싶은 것 이상으로 체화하고, 경험하고, 느끼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타자성, 타지를 화두로 작업”하는 그에게 타자를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은 여행을 통해 얻게 된다. “여행을 너무 싫어한다”면서도 지금 그에게 가장 갈급한 것도 ‘여행’이라고 한다.
“팬데믹 시대에 저와 같은 삶의 형태가 지속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코로나로 인해 국경은 닫히고, 국가주의적으로 좁아지기도 했으니까요. 이 기간 동안의 전시는 깍두기처럼 잘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 여행이 불가능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국제적으로 전시하는 저와 같은 활동 형태는 공룡 혹은 화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한국인이 이누이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됐죠. 살아남으려면 더 치고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제겐 여행이 간절해요. 여행을 가면 그 땅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공감하고 싶어지고, 겸손해지거든요. 그것이 새로운 동력이나 영감이 되기도 하겠죠.”
고승희 기자 /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