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 로랑, 명성은 눈부시면서도 슬픈 행복
By 홍연진 (스토리텔러)
생 로랑(Saint Laurent)은 1961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프랑스 파리에서 런칭한 패션 브랜드이다. 생 로랑은 1960년대 주류였던 고급 맞춤복 오뜨꾸뛰르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1966년에 기성복 라인 ‘리브 고시(Rive Gauche)’를 런칭하며 당시 패션에 젊은 스트리트 감성을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이브닝 웨어인 턱시도 정장을 여성화한 ‘르 스모킹(Le Smoking)’을 선보여 여성이 당당하면서도 편안하게 옷을 입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몬드리안 컬렉션(Mondrian Collection)’ 역시 예술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로 큰 주목을 받았다.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코코 샤넬(Coco Chanel)과 함께 20세기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사진 출처=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스틸컷>
이브 생 로랑이 이처럼 명성이 자자한 브랜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브랜드이기에 앞서 한 명의 디자이너, 한 명의 사람이었던 이브 생 로랑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Yves Saint Laurent - Pierre Berge, L'amour Fou, 2010)>는 이브 생 로랑의 천재성과 업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평생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동성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을 취한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이브 생 로랑은 어린 나이였지만, 디올 하우스가 선보인 80벌의 드레스 중 50벌이 그의 디자인이었을 정도로 스승인 디올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다. 1957년 디올이 타계하자 21살이었던 이브가 디올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디올 하우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게 된다. 1년 후 이브는 디올 하우스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마케팅 전문가인 피에르 베르제를 알게 된다. 서로에게 단번에 끌린 두 사람은 동성의 연인이자 평생을 함께하는 오랜 파트너가 됐다.
<사진 출처=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스틸컷>
1960년,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 이브 생 로랑은 군에 입대해 알제리로 파병을 가게 된다. 그는 알제리에 도착한 지 불과 3주 만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정신병원으로 실려 갔다. 프랑스 언론은 그가 책임을 회피했다며 크게 비난했고, 디올도 그를 해고하고 마르크 보앙(Marc Bohan)을 그 자리에 앉혔다. 피에르 베르제는 병원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브가 퇴원 직후 패션 하우스를 열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왔다.
피에르 베르제는 계약 위반을 이유로 디올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10만 불의 보상금을 얻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꾸뛰르 하우스를 설립해 1962년에 대망의 첫 컬렉션을 개최했다. 선원들이 즐겨 입는 피 재킷(Pea jacket)과 바지, 튜닉 등을 소개한 첫 컬렉션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브 생 로랑은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
이후 이브는 피에르 베르제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패션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해나갔다. 1965년 선보인 몬드리안 컬렉션을 거쳐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부티크 ‘리브 고슈’까지 크게 성공했다. 이브는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가치관에 따라 고급 브랜드의 대안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부티크 패션을 만들었다. 1966년에 처음 선보인 남성의 턱시도 정장을 여성화한 ‘르 스모킹’은 이브 생 로랑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되고, 이브 본인도 르 스모킹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다.
<사진 출처=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스틸컷>
이브 생 로랑은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대중들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그 내면을 보지 못했다. 피에르 베르제만이 우울증에 시달려 술과 마약에 빠진 이브를 볼 수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상 매번 정해진 시간을 칼같이 지키며 독창적인 룩을 선보여야 했다. 그는 한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4만장의 드로잉을 그렸는데, 그 때마다 광적인 상태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브 생 로랑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전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명성과 행복은 별개의 문제였다. 피에르 베르제는 그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명성은 눈부시면서도 슬픈 행복이다.”
영화 속에서 피에르 베르제는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브 생 로랑을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그였다. 소중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 이후 함께 수집했던 미술품을 경매에 부치는 그의 모습은 시원섭섭해보였다. 이브는 자신의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켰고, 또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만큼 견뎌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피에르 베르제의 바람처럼 이제 이브 생 로랑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늘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생 로랑이라는 브랜드의 명성을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브 생 로랑의 천재성과 화려한 삶을 조명한 영화도 아니었다. 한 예술가의 삶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반추하는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영화였다. 그 가운데에는 패션에 대한 이브 생 로랑의 열정이 있었고, 그와 피에르 베르제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앞으로도 눈부신 명성을 이어나갈 이브 생 로랑, 하늘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찾았기를 간절히 바란다.